프로야구 아웃사이드 파크 -역대 라이벌 열전
 “인생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라이벌의 희열이다.” 라이벌(Rival)은 ‘같은 강 주변의 거주자’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고, 프랑스어와 영어를 거치면서 ‘하나의 목적을... 프로야구 아웃사이드 파크 -역대 라이벌 열전

[일요신문] “인생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라이벌의 희열이다.”

라이벌(Rival)은 ‘같은 강 주변의 거주자’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고, 프랑스어와 영어를 거치면서 ‘하나의 목적을 두고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발전했다고 한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수시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라이벌을 만나기 마련이다. 특히 승부의 세계에서 라이벌의 환희는 곧 나의 좌절로 직결된다. 이런 이유로 선수들에게 최고의 활력소이자 자극제이기도 하다. 라이벌과의 승부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훈련하고 이를 악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이벌끼리 펼치는 선의의 경쟁은 결국 두 선수 모두를 발전시킨다.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에도 그렇게 리그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최고의 라이벌들이 존재했다.

# 선동열과 최동원

‘무쇠팔’ 고 최동원과 ‘국보’ 선동열은 한국 프로야구사를 대표하는 역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나이로는 5년 터울이고 프로 경력으로는 4년 선후배 사이였던 이들은 강속구와 제구력을 겸비한 최고의 투수들이었던 것은 물론, 영남(최동원)과 호남(선동열), 연세대(최동원)와 고려대(선동열), 롯데(최동원)와 해태(선동열)의 자존심이 걸린 대리전까지 펼쳤다.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생의 맞수였던 셈이다.

자웅을 겨루기도 힘들다. 현역 시절 세 번의 맞대결을 펼쳐 1승 1무 1패.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은 최동원과 선동열의 맞대결 앞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세 경기 모두 두 투수가 최고의 피칭을 펼치며 완투했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스토리 덕분에 <퍼펙트 게임>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둘의 첫 맞대결은 1986년 4월 사직구장에서 펼쳐졌다. 결과는 해태의 1-0 승리. 선동열은 프로 데뷔 첫 완봉승을 따냈고, 최동원은 3회 솔로홈런 하나를 허용해 통한의 완투패를 당했다. 4개월 후 사직구장에서 다시 두 번째 맞대결이 열렸고, 이번엔 결과가 반대였다. 최동원이 선동열을 상대로 완봉승을 따냈다. 선동열은 2실점으로 완투패했는데, 2점이 모두 수비 실책으로 인한 비자책점이었다.

세 번째 맞대결은 그야말로 ‘전설적’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밑줄을 치고 기억해야 할 경기 가운데 하나였다. 1987년 5월 16일, 다시 사직구장. 당시 스물아홉으로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던 최동원과 스물넷으로 패기와 힘이 넘쳤던 선동열은 둘 다 연장 15회로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마운드를 내려가지 않았다. 두 투수의 투구수 합계가 무려 441개. 선동열은 232개, 최동원은 209개의 공을 각각 던졌다. 요즘 웬만한 선발 투수들의 2경기 투구수를 합쳐도 넘을 수 없는 숫자다. 경기는 끝내 4시간 56분 만에 2-2 무승부로 마무리됐고, 최동원과 선동열의 전설적인 명승부도 그렇게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 김재현과 김동주

1993년 9월 한 일간지에는 ‘신일 김재현-배명 김동주, 좌-우 최강 타자 가린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김재현은 ‘대통령배에서 홈런, 타점, 안타상을 휩쓴 장효조 이후 최고의 왼손타자’로 묘사됐고, 김동주는 ‘투수를 겸하면서도 전국대회에서 0.769라는 놀라운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소개됐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아마야구의 내일이 이들의 양 어깨에 걸려있다’고 적혀 있었다.

왼쪽부터 김동주, 김재현 .

LG 김재현과 두산 김동주는 고교 시절 ‘좌 재현, 우 동주’로 불린 최고의 타자이자 운명의 라이벌이었다. 김재현은 신일고 1학년 때부터 동기생인 조인성(한화), 1년 선배 강혁과 함께 고교무대를 평정했다. 김동주는 약체 배명고의 고독한 4번타자이자 에이스였다. 명문 사학 라이벌인 연세대와 고려대는 각각 김재현과 김동주를 스카우트하면서 대학 무대에서도 세기의 라이벌전이 펼쳐지기를 기대했다. 서울의 연고 구단 LG와 OB도 김재현과 김동주를 두고 불꽃 튀는 스카우트 경쟁을 벌였다.

김재현이 연세대가 아닌 LG행을 택하고 김동주는 예정대로 고려대로 향하면서 둘의 행보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김재현은 1994년 신인 최초로 20홈런-20도루를 달성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뒤 LG의 간판 스타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김동주는 1997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일본을 상대로 백투백 홈런을 기록하는 등 대학 무대를 평정한 후 1998년 LG의 라이벌 팀 OB에 입단해 ‘잠실의 거포’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이후 김동주는 부동의 국가대표 4번타자 자리를 지키면서 김재현을 압도했지만, 김재현은 부상에 시달리다 SK로 팀을 옮기는 불운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현역 생활 마지막 순간의 명암은 다시 반대로 확연하게 엇갈렸다. SK에서 2007년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며 부활에 성공한 김재현은 2009년 시즌이 끝난 뒤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고 은퇴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가장 아름다운 모양새로 지켜졌다. 반면 김동주는 사생활 문제와 감독들과의 연이은 불화로 선수 생활 말년의 대부분을 2군에서 보내다 결국 지난해 말 쓸쓸히 유니폼을 벗었다.

# 이승엽과 심정수

삼성 이승엽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지닌 타자다. 한국 야구에서 홈런의 역사를 논할 때, 이승엽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만큼 위대하다. 그런 이승엽의 선수 생활에서 유일하게 ‘라이벌’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존재가 있다. 그의 1년 선배였던 심정수다. 2002년과 2003년, 이승엽과 심정수 덕분에 한국 프로야구는 역대 가장 흥미진진하고 강력한 홈런 경쟁을 목도했다.

2003년 골든글러브상 시상식서 심정수와 이승엽.

이승엽은 2002년 홈런 47개를 때려내 홈런왕에 올랐다. 당시 현대 소속이던 심정수의 홈런 수는 46개. 단 한 개 차로 2위에 머물렀다. 이듬해인 2003년 이승엽은 역대 한 시즌 최다인 56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더 높이 날아올랐다. 심정수는 바로 그해 홈런 53개를 쳤다.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숫자였지만, 심정수보다 3개를 더 때려낸 이승엽 때문에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많은 야구 전문가들은 여전히 “당시 심정수라는 훌륭한 ‘페이스메이커’가 없었다면 이승엽도 기록을 세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서로의 존재가 이승엽과 심정수 모두에게 긍정적인 자극과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심정수는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난 뒤인 2007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홈런왕에 올랐고, 만 33세였던 2008년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2004년 이후 숱한 부상에 시달리면서 양쪽 어깨와 무릎에 모두 수술을 받았고, “더 이상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판단해 이른 나이에 배트를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심정수의 통산 홈런수는 328개. 만약 그가 그때 부상을 이겨내고 여전히 이승엽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다면? 야구팬들은 지금 이승엽과 심정수가 펼치는 통산 최다 홈런 경쟁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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