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펠 추기경 성폭행 유죄 조지펠 추기경 성폭행 유죄
1996년 멜번 대주교 재임시 합창단 중학생 2명 성폭행 12월 유죄 평결 후 보도금지명령으로 기사화 안되 카톨릭 교회 성범죄 유죄판결 받은 최고위... 조지펠 추기경 성폭행 유죄

1996년 멜번 대주교 재임시 합창단 중학생 2명 성폭행

12월 유죄 평결 후 보도금지명령으로 기사화 안되

카톨릭 교회 성범죄 유죄판결 받은 최고위 성직자

시드니 Redemptoris Mater 신학교 개교식에서 축사하는 조지 펠 추기경. 사진: Kerry Myers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호주 최고위 가톨릭 성직자 조지 펠 추기경이 멜번 대주교 시절 합창단원 두 명을 성폭행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건은 1996년 멜번 성패트릭 대성당에서 일어났다.

펠 추기경은 계속 무죄를 주장하고 있으며 변호인단은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펠 추기경은 지난해 12월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재판 세부 내용은 빅토리아 지방법원에서 보도금지 명령이 해제된 후인 26일에야 언론을 통해 드러났다.

아동 성폭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가톨릭 성직자 중 전세계에서 최고위직인 조지 펠 추기경은 빅토리아주 지방법원에 들어설 때와 같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법원을 나섰다. 법원에서 현장을 지켜본 ABC 기자는 펠 추기경이 유죄 판결이 내려질 때 역시 무표정한 표정으로 시선을 카펫으로 내렸다고 전했다.

빅토리아 중급법원에서 5주간 계속된 재판과 3일이 넘게 진행된 배심원 심리는 카톨릭 사상 최고위 성직자 유죄 평결로 종결됐다. 이 사건을 처음 심의한 첫번째 배심원단은 만장일치 평결에 도달하지 못해 해산됐고, 그들 중 일부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2번째 배심원단은 16세 미만 아동 대상 성적삽입 1건과 아동과 또는 아동 면전 추행을 포함한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평결을 내렸다.

평결 직전 펠 추기경 변호인단은 재판 개정을 기다리며 대화하는 느긋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유죄’라는 말이 떨어지자 변호인단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졌다. 배심원단이 법정에서 빠져나간 후 추기경 변호인단은 이례적으로 숨죽인 어조로 판사에게 의뢰인이 시드니에서 무릎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보석 연장을 신청했다.

판사는 “펠 추기경이 맞게 될 선고의 징후는 절대 아니다”고 강조하며 펠 주기경에게 짧은 보석을 허락하는 대신 양형심리시 구류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 주 양형 선고를 앞두고, 펠 추기경은 바티칸 관저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감옥에서 지내게 된다.

펠 주기경은 누명을 벗겠다며 로마 바티칸 재정부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 호주로 자진 귀국했다.

카톨릭 교회 신자들은 펠 추기경 법정 변호를 위해 기부를 요청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펠 추기경 법정 변호는 대립적인 법정 전략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명 법정 변호사가 이끌었다.

그러나 기소 후 18개월이 지난 지금 펠 추기경은 카톨릭 교회내 직위 유지는 고사하고 휴가 후 바티칸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한때 교황 후보로까지 간주될 정도로 카톨릭 교계 위계에서 고위직까지 오른 호주 최고위 카톨릭 성직자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성당 성가대 출신 남성 1명이 내놓은 증거였다.

대성당 미사 직후 성구실

카톨릭 교회 성당 합창단원이었던 이 남성이 2015년 처음 빅토리아주 경찰에 증언한 것은 펠 추기경이 바티칸 경제사무국장을 맡은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이다.

이 남성은 1996년 추기경이 멜번 대주교로 임명된 직후 이스트 멜번에 있는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펠 추기경에게 두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가장 심각한 혐의는 펠 추기경이 이 남성의 친구를 성폭행한 뒤 이 남성에게 성행위를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 피해자는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으며 증거도 언론인과 일반인이 제외된 비공개 법원에서 제출됐다. 그러나 이 피해자의 증언은 재판 중 검찰과 변호인이 읽은 녹취록의 일부에서 추릴 수 있다.

피해자 법정 증언에 따르면 피해자는 당시 투락에 위치한 명문 카톨릭 사립학교인 세인트 케빈학교 학생이었다. 남성은 당시 학교에서 운영하던 음악활동 일환으로 성 패트릭 대성당 합창단에서 성가를 불렀다.

1996년 12월 말 일요일 미사에서 노래를 부른 후, 그와 또 다른 합창단원은 리허설실로 돌아간 다른 합창단원 대열에서 벗어났다. 피해자는 성직자들이 옷을 입는데 사용하는 성당 뒤쪽에 있는 성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곳은 합창단원에게는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이 합창단원 2명은 “주위를 둘러보는 장난꾸러기 아이들”로 제단 포도주병을 발견하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예복을 입은 펠 당시 대주교가 혼자 문간에 나타났다. 피해자는 펠 추기경이 “여기서 뭐하는 거니?” 아니면 “큰 일 났다” 같은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피해자는 “그 순간 우리는 둘 다 얼어붙었는데 그가 예복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바지나 허리띠를 풀었다”고 말했다. 소년 중 1명은 펠 추기경에게 “그냥 가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아무 것도 안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신, 당시 대주교는 소년 중 한 명을 옆으로 끌어당겨 그의 머리를 자신의 성기 쪽으로 밀었다. 몇 분 후, 그는 다른 합창단 소년에게 옮겨가 구강 성행위를 강제했고 자위하면서 그 소년을 어루만졌다.

전 합창단원은 배심원들에게 “옷을 다시 입고, 자세를 고쳤다”며 끔찍한 사건 전체가 몇분 밖에 걸리지 않은 것 같다고 추정했다. 피해자 소년 2명은 “일어나서 방에서 나가 다시 합창단 탈의실 구역으로 돌아갔다.” 당시 피해자 2명은 모두 13세였다.

몇 달 후, 이 피해자는 다시 펠 추기경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일요일 미사가 끝난 후 당시 대주교는 그를 복도벽에 밀어넣고 짧은 시간 폭행으로 그의 몸을 더듬었다.

20년간 침묵, 비밀의 무게

거의 20년 동안, 그는 이 기억을 자신의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가둬버렸다. 그는 재판에서 “당시엔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 내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다. 나는 학교 교육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걱정했다.” 무엇보다 “나서서 대주교에 대해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피해자는 법정에 출두할 용기를 내는데 수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 동안 가해자는 대주교에서 추기경이 됐다. 이 피해자와 같이 성폭행을 당한 다른 소년은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배심원단은 그가 단순히 “사고 상황”에서 사망했다고만 들었다.

법언 제출 증거에 따르면 사망한 피해자는 폭행 사건이 발생한 지 몇 년 후 모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도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성폭행을 부인했다. 결국 1996년 12월 성당 뒤편 방에서 소년 2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것은 남은 친구 몫이 됐다.

배심원단은 피해자가 증거를 제시하고 추기경 변호인단의 대질심문 공세를 받는 모습과 목소리를 지켜보고 듣는데 이틀 반을 보냈다. 피해장의 증거 녹취록 전체를 법원에서 공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사 집전 직후 성폭행 사실상 불가능?

원고 증언이 끝난 후, 법원은 모두 남성인 다른 증인 수십명이 증인석에 설 수 있도록 다시 개정했다.

펠 추기경 변호사인 로버트 리히터 변호사는 첫 변론에서 배심원단을 향해 혐의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불가능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증인에 의존했다. 리히터 변호사는 “주요 문제는 조지 펠이 거룩한 미사 종료 10분 정도 이내에 두 명의 젊은 합창단과 단둘이 있는 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그는 “그냥 열린 문으로 걸어 들어가 두 어린 소년을 보고 갑자기 그들을 구강 강간하기로 결심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라고 의문을 던졌다. 10여명이 넘는 전 합창단원이 증인석으로 불려와 일요일 미사와 미사 후 합창단 행렬의 질서 정연함 여부에 대해 설명했다.

이 증인 중 펠 대주교가 예복을 입고 혼자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합창단원이 2열로 리허설실로 돌아갈 때, 2명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눈치챈 단원도 없다. 그러나 전 합창단원 데이비드 메이스는 “우리는 아직 학생이었고, 어떤 무질서라도 기회만 있으면 잡았을 것이다… 혼란이 계속 스며들려고 했다”고 증언했다.

합창단 소속 성인의 기억은 약간 다르다. 이들은 법정에서 소년들이 합창단실로 돌아가 합창복을 벗을 때까지 엄격한 규율이 유지됐다고 말했다. 아들이 합창단원이었던 로드니 디어링씨는 “눈에 띄는” 합창복을 입은 두 소년이 행렬에서 떨어져 나갔다면 쉽게 눈에 띄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합창단을 감독했던 피터 피니건씨도 이 증언을 지지했다. 그러나 또한 합창단원 2명이 미사후 눈에 띄지 않고 빠져나갔다면, 출석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법정에서 성폭행에 대해 노골적인 세부사항이 논의되자 교황에게 선물로 받은성직자 금반지를 낀 추기경이 피고석에서 수기로 많은 내용을 적는 것이 기자들 눈에 띄었다.

재판 처음부터 교황의 최측근 자문관으로서 추기경의 지위는 중요한 요소였다. 키드 판사는 사건 첫날 100명이 넘는 배심원단 후보에게 “피고 조지 펠 추기경은 분명히 카톨릭 교회에서 매우 고위직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카톨릭 신자들이거나 반대로 교회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정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배심원으로서 자진 사퇴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법원은 많은 지역 사회 구성원이 배심원단에서 사퇴할 것을 고려해 보통 때보나 대규모 배심원단 후보를 꾸렸디.

키드 판사는 “이번 재판이 펠 추기경을 혐의에 포함되지 않은 행위나 일반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행위나 실수에 대한 희생양으로 만드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Cardinals during 15 March 2016 Consistory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재한 바티칸에서 열린 2016년 3월 15일 추기경 회의 모습. 왼쪽에서 5번째가 펠 추기경. 사진: Centro Televisivo Vaticano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

펠 추기경, 대주교 재임시 카톨릭내 아동성폭행 대응체제 설립

펠 추기경은 가톨릭 교회의 아동 성학대 취급에 대한 번개 같은 진노의 대명사였다.

추기경의 변호인단은 심지어 펠 추기경에게 직접 호주로 돌아가 아동학대 왕립조사위에 직접 출두하라고 압력을 가하기 위해 곡을 쓴 팀 민친까지 언급할 정도로 의뢰인에 대한 공론 분열을 서슴지 않고 언급했다. 리히터 변호사는 “보세요, 추기경은 돌아왔고, 누명을 벗기 위해 자발적으로 돌아왔습니다”라고 강조했다.

1996년 12월, 성폭행 범행이 자행되었을 당시, 조지 펠 추기경은 카톨릭 교회에서 승승장구 가도에 올라 있었다. 그는 멜번 대주교 임명 4개월째 자신의 대교구 내에서 성직자의 아동 성학대 주장을 처리하는 제도인 멜번 대응책(Melbourne Response)를 발표했다.

펠 추기경은 자신이 아동학대 위기를 수습한 최초의 호주 대주교라는 경력을 자주 인용했고 2016년 경찰 인터뷰 때도 이런 주장을 되풀이했다. 재판 중 인터뷰 녹화를 틀자 공판 몇 주 동안 들을 수 없었던 펠 추기경의 목소리가 법정을 가득 채웠다.

펠은 “환상의 산물”이라며 모든 혐의 전체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펠 추기경은 자신을 심문하던 형사에게 무시하듯 “아, 이제 그만 하지”라며 “완전히 수치스러운 쓰레기 같은 얘기”라고 말했다. 펠 추기경과 형사는 당시 추기경이 교회 재무를 관리하던 바티칸시에서 차로 1시간도 되지 않는 로마 공항 힐튼 호텔 회의실에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물론 추기경 옆에는 변호인단이 대동했다.

피해 성가대 소년의 사진을 본 추기경은 당시 합창단원 중에는 아는 아이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형사가 사건에 중요한 날짜와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하자 추기경은 팔짱을 풀고 메모하기 시작했다.

펠 추기경은 형사에게 “직원들과 합창단원이었던 사람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인터뷰로도… 그 혐의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가장 확실히 거짓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카톨릭 교회 일부로 인한 아동 성학대로 입은 상처를 인식하고 보상하고 치유도록 도움을 주는 교회 구조를 만든 서방세계 최초 인물”이라는 점도 상기시켰다.

펠 추기경이 1996년 멜번 대주교로 있을 당시 주도한 카톨릭 교회내 아동성폭행 피해자 대응제도인 멜번 대응책은 보상금을 5만 달러로 제한했으며, 소송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독립성과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비난받았다. 이후 멜번 대응책은 보상금 최고액을 2000년 5만 5000달러로 올린 후 7만 5000달러에서 다시 인상해 현재 최고액은 15만 달러이다. 2015년 왕립조사위 당시 사례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설립 후 2014년 3월까지 평균 보상액은 약 3만 2000달러였다. 2013년 멜번 대응책에 멜번 대주교구에서 지출한 금액은 총 298만 7674달러에 달한다.

펠 추기경이 멜번 대응책을 설립했기 때문에 과연 희생자 피해보상 제도를 세운 대주교가 몇 달 후에 자신의 대성당에서 소년 2명을 성폭행할 것이냐는 기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성폭행 피해 딸 둔 부모에 ‘법정서 증명하라’

펠 추기경의 경찰 심문 비디오 녹화가 배심원들에게 상영되던 당시 오랜 기간 카톨릭 성폭행 피해자 권익 활동을 벌여온 크리시 포스터씨는 법정 방청석에서 이를 지켜봤다.

포스터씨의 딸 2명은 1980년대 멜번 지역 한 교구에서 소아성애 신부 케빈 오도넬에게 성폭행당했다. 그 당시 카톨릭 교회는 오도넬이 아이들을 성폭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톨릭 교회는 이미 1958년 이후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포스터씨와 고인이 된 남편 앤소니씨는 멜번대응책을 경험한 첫 번째 피해 가족 중 하나로 1996년부터 펠 추기경을 대했다. 포스터씨는 당시 대주교를 가톨릭 교회의 대주교로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회상했다.

포스터씨는 대주교가 자신들보다 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며 “펠은 ‘당신들이 말하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우리에게 법정에 증거를 가지고 가서, 법정에서 그것을 증명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포스터씨는 “물론 증거가 없다. 어떤 증거가 있겠는가? 오도넬이 우리 딸을 데리고 갔을 때 ‘아, 여기 증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다섯 살짜리 아이가 비디오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비디오로 찍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추기경이 당시 피해 아동 부모들이 어떤 증거를 제시하거나 논쟁하지 못할 것을 알고 그러한 단어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포스터씨는 “말 대 말일 뿐이다. 그래서 극도로 화가 나고 실망스러웠다”며 이번 평결을 지켜본 후 당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철저하게 억합한 것” 같다고 말했다.

미사 후 대주교 혼자 있을 시간 있었나?

재판이 시작된 지 거의 2주일이 다 된 시점에는 대성당에서 당시 펠 대주교의 오른팔이었던 성직자가 증인으로 출두했다.

일부 증인이 펠의 그림자 또는 경호원으로 설명한 교구 신부 찰스 포텔리는 대주교의 제식담당자로 대성당에서 펠의 곁에 있어야 했다.

포텔리 신부는 1996년 당시 대주교 공구실 서랍이 옻칠해 닫혀 있었기 때문에 교구 신부의 성구실을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당시 “시스템상의 버그를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대주교의 첫 몇주간 미사를 기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펠 추기경이 혐의를 받고 있는 성폭행은 바로 첫번째 몇 번 미사 중 한 때 이후에 일어난 것이다.

포텔리 신부는 배심원들에게 펠 대주교가 대주교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미사 직후 성당 앞 계단에서 신도들에게 인사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펠 대주교가 예복을 벗기 위해 성구실로 돌아갈 때 함께 가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포텔리 신부는 아주 드문 경우에 펠 대주교를 따라 성구실로 가지 않고 오후 미사를 위해 설교 준비를 위해 대신 제단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배심원들에게 “그가 성구실에 혼자 있던 적이 내가 알고 있기로는 없다”고 말했다. 한 증인은 복사들이 제단에서 중요한 물품을 내오기 위해 드나들었기 때문에 성구실이 미사 후 번잡했다고 증언했다

검찰이 변호인단에게 넘겨받은 증인 2명이 잠재적으로 핵심적인 증거가 됐다. 첫번째 증인은 1973년부터 일지를 기록한 남성으로 성당내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과 미사 집전 주교의 이름을 포함해 자신이 성당에 출석한 모든 미사기록이 담겨 있다.

그가 증언하기 전 검찰은 해당 성폭행이 일어난 일요일 미사를 특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증인 제프리 코너씨의 일지로 1996년 펠 대주교가 성패트릭 대성당에서 집전한 미사는 2차례 뿐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범죄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는 날이 12월 15일과 22일로 좁혀졌다.

코너 씨는 펠의 법률팀과 접촉했던 전 성당 복사가 자신의 일지에 대해 물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2번째 증인 대니얼 맥글론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는 펠 변호인단 중 한명과 대학 동창으로 변호사들간 소문을 통해 혐의에 대해 알게 된 후 동창에게 연락했다고 증언했다.

맥글론씨는 법정에서 혐의가 성당 미사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상충된다고 말했다. 자신은 대성당에서 첫번째 일요일 미사를 집전한 후 성당 앞 계단에서 어머니를 소개한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대주교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아들이 아주 자랑스러우시겠다”고 말하자 어머니가 ‘잘 모르겠다’고 답했기 때문에 절대 잊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맥글론씨의 증언은 성폭행 혐의가 일어난 때에 사실상 대주교가 성당 앞 계단에 있었다는 것으로 대주교에게 성폭행 사건 발생 가능 일요일 중 하루에 대해 알리바이를 사실상 주는 것이다.

그러나 맥글론씨 기억에는 몇 가지 결함이 있었다. 그는 해당 일요일 미사가 펠 대주교 미사에 처음 복사로 봉사한 날이라고 증언했으나 검찰은 맥글론씨가 해당 일요일 1주일 전 토요일 밤 대주교 미사에 복사로 봉사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이밀었다.

말 대 말

마지막 검찰측 증인이 증언한 후, 펠의 변호인단은 더 이상 피고측에서 증인을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펠 추기경이 증언대에 서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펠 추기경에 대한 경찰 심문 영상이 배심원이 추기경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됐다.

대신에, 피고측은 펠의 범행이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증언에 의존했다.

검사가 최종 변론을 하기 위해 일어서자 스모킹 건이 없는 것이 확실해졌다. 마크 깁슨 검찰측 변호사는 “’[어린 십대였을 때] 나와 내 친구에게 일어난 일이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젊은 남성이 있다”고 말했다.

깁슨 변호사는 “증거를 정밀 검토한 결과, [원고의] 진술은 [피고 변호인에서] 제시한 있을성 싶지 않음이나 불가능성을 극복한다. 증거는…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깁슨 변호사는 미사가 끝난 후 5분에서 6분 동안 성구실에서 활동이 중단되는 동안 성폭행이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증거들을 실타래처럼 모았다. 아무도 감히 사제의 성구실에 들어가지 않았을 몇분이 과연 있었을까?

그는 배심원들에게 펠 대주교가 미사 후 계단에서 교구민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일상이 됐을 수도 있지만, 성폭행은 어떤 습관도 생기기 전인 초기 예배 중 한 때 발생했다고 말했다.

깁슨 변호사는 전 합창단원이 성구실이 출입금지구역이라고 증언했지만 원고는 그 방을 묘사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범죄가 일어났을 때 원고가 실제 성구실에 있지 않았다면 포도주가 보관된 그 방의 배치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펠의 변호인단은 원고를 거짓말쟁이라고 공격했다. 로버트 리히터 변호사는 “그가 믿게 된 환상의 윤색이든 어떤 다른 것이든, 이야기는 만든 것”이라며 “정리를 하는 과정은… 신부의 성구실이 아주 순간적으로만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뜻”이라며 사건 발생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리히터 변호사는 배심원단을 향해 “여러분에게 있는 것은 물론 너무 많은 내재된 모순과 변화가있는 이야기를 말한 [원고]를 제외하고는 일련의 가능성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결국, 배심원단이 원고를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였는지 여부에 귀착됐고 이틀 반 동안 원고의 증거를 보고 들은 후에 그들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유죄 평결로 원고는 피해자가 됐고 호주에서 최고 권력이 있는 카톨릭 사제는 유죄판결을 받은 아동 성범죄자가 됐다.

물론 펠 추기경 변호인단은 유죄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으며 다음 판결까지는 수개월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항소했다고 해도 펠 추기경은 다음 주 양형 선고를 받게 된다. 빅토리아 27일 중급법원이 보석을 취소하면서 추기경은 감옥에서 운명을 기다리게 됐다. 지난해 12월 유죄 판결 후 법원은 추기경이 무릎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보석을 허가했다.

펠 추기경은 지난 12월 평결 직후 교황청 최고재무관직을 박탈당했고 9인으로 알려진 교황청 내프란치스코 교황의 신뢰받는 추기경들의 모임인 프란치스코 교황 측근에서 제적됐으나 당시 보도금지 명령으로 인해 언론에서는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

생존한 피해자는 보도금지 명령이 해제된 후 변호사를 통해 발표한 성명서에서 사건에 대한 관심에 감사를 표했다. 그는 “많은 생존자와 같이 마찬가지로 나는 수치심과 외로움, 우울증과 고투를 경험했다. 많은 생존자들처럼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데 많은 세월이 걸렸다”고 말했다.

또한 “어느 순간 우리는 두려워했어야 할 사람을 신뢰했다는 것과 우리가 신뢰해야 할 진정한 관계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고통스러웠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현재 진행 중인 형사 절차에 대처하기 위해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며 “나는 아동 성학대에 대한 대변인이 아니다. 나는 가족을 최대한 부양하고 보호하기 위해 일하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라며 기자들이 자신과 가족의 개인생활을 존중해 줄 것을 호소했다.

펠 추기경의 유죄 평결 후 리치몬드 축구 클럽은 즉시 펠 추기경을 후원자 명단에서 삭제했으며펠 추기경 모교는 펠 추기경을 기념해 만든 건물에서 추기경의 이름을 지웠다. 녹색당은 펠 추기경에게 수여된 호주훈장을 취소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사상 최고위 바티칸 성직자 재판에 세계가 주목

호주 지방법원 보도금지 명령에 추기경 유죄 보도 못해

당시 전세계 언론매체 기자가 사상 최고위 바티칸 성직자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성폭행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멜번으로 모여들었다. ABC 뉴스는 재판을 취재한 뉴욕 타임즈 호주 지국장인 데이미언 케이브의 발을 인용해 추기경 재판에 전세계에서 주목했다고 말했다.

빅토리아주 법원은 다른 혐의와 관련된 다른 사건에서 평결이 나올 때까지 재판에 대한 모든 보도를 금지했다. 다른 사건은 펠 추기경이 1970년대 빅토리아주 지방 성직자로 있을 때 발라랏 수영장에서 소년 2명을 성추행한 혐의와 관련된 사건이다. 그러나 해당 사건에 대한 기소는 취하됐다.

케이브 기자는 보도금지 명령에 엄청나게 놀랐다며 미국식 사법 시스템에 더 익숙한 신문에 막대한 문젯거리였다고 말했다. 그는 “멜번 법정 판사 1명이 세계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인물에 대해 세계가 읽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규정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내 생각에 세계에 정말 충격이다”라고 강조했다.

빅토리아주 소추국장은 12월 유죄 평결 후 펠 추기경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고위급 인사”가 심각한 범죄 혐의로 기소됐다고 보도한 것에 대해 언론사와 기자를 상대로 법정 모독죄로 형사고발할 수 있다는 서신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주교회의 “법 앞에 평등” – 항소 결과까지 판단 유보

재판에 대한 보도는 금지됐지만 카톨릭계는 이미 유죄평결 결과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며 자신들이 알고 있던 조지 펠 추기경이라는 인물이 누구였는지 이해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윌슨 대주교의 경우와 같이 호주천주교 주교회의는 사법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펠 추기경에 대한 판단이나 조치를 미뤘다. 주교회의는 26일 성명서를 통해 “조지 펠 추기경의 역사적인 아동 성추행 혐의에 대한 유죄판결 소식은 호주 전역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며 판결 결과에 대한 충격을 나타냈다.

그러나 주교회의는 “모든 사람이 법에 따라 평등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며, 호주 법체계를 존중한다. 평결을 내린 동일한 사법제도는 추기경 법무팀이 제기한 항소를 고려할 것”이라며 “이 과정을 통해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며 판단은 유보했다.

주교회의는 “학대를 당한 모든 사람들과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며 “교회가 모든 사람들, 특히 어린이와 약자들에게 안전한 곳이 되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하는 데 우리 자신을 새롭게 헌신한다”고 성명서를 끝냈다.

전직 성직자로 가톨릭 역사학자인 폴 콜린스는 이번 평결이 호주에서 가장 안 지켜진 비밀 중 하나라며, 전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몇 주 동안 유죄 평결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콜린스씨는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여전히 펠 추기경의 유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공동체에게 겪으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호주 카톨릭 신자들이 더 많은 폭로와 위기를 겪었다며 펠 추기경 같은 교회내 지위와 영향력 있는 사람이 소아성애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자들의 근본까지 철저히 흔들었다고 말했다.

콜린스씨는 펠 추기경이 “지난 20년간 사실상 (호주) 가톨릭 교회를 지배해 온 사람이다. 이 사람은 주교 임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사람으로 주교들이 지도력에서 이처럼 비참한 실패작이 된 한가지 이유가 펠이 주교 임명을 위해 로마에 내세웠던 사람들이 그런 종류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ABC 멜번 베테랑 라디오 진행자 존 페인(Jon Faine)씨는 ABC 뉴스와 인터뷰에서 유죄 판결 사실이 보도된 26일 아침 방송 중 수백통의 전화와 문자를 받았다며 대부분 “신앙이 흔들렸다”며 추기경의 범죄에 혐오를 나타냈다고 전했다. 그 중 시내에서 전화한 남성 청취자 1명은 평생 주변에서 “나쁜애”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들었고 부모조차 펠에 대한 자신의 얘기를 믿지 않았지만 자신이 옳았다고 털어놨다.

변호사 출신인 페인씨는 호주인 중 펠 추기경 같은 막대한 변호인단을 꾸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호주 재판에서 이번 추기경 변호인단만큼 검찰의 주장을 철저히 검증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페인씨는 세상에 있는 돈을 다 썼지만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았다.

추기경 선고기일은 3월 13일이다.

  • Bravehearts 아동 성폭행 생존자 상담 및 지원 전화: 1800 272 831
  • Lifeline 24시간 응급지원 및 자살방지. 전화: 13 11 14
  • PartnerSPEAK 비범죄 배우자를 위한 동료단체 지지 (03) 9018 7872
  • Child Wise – 1800 991 099 Trauma informed telephone and online counselling for childhood abuse. Training and organisational capacity building on child abuse prevention
  • In Good Faith Foundation – 03 9326 1190 Independent advocacy, case work, referral and support to aid recovery for survivors, their families and communities responding to religious institutional abuses.
  • MensLine Australia  – 1300 78 99 78 National telephone and online support, information and referral service for men with family and relationship concerns
  • Sexual Assault Counselling Australia – 1800 211 028 National telephone counselling service for people who have experienced abuse. Face-to-face counselling is available in New South W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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