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 ‘러시아 연해주 대장정’ [1]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
 중국 동북지역과 더불어 러시아 연해주는 우리 한민족의 험난한 이주사와 항일투쟁사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일요신문>은 지난 4월, ‘광복 70주년 기획 2500㎞...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러시아 연해주 대장정’ [1]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

[일요신문] 중국 동북지역과 더불어 러시아 연해주는 우리 한민족의 험난한 이주사와 항일투쟁사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일요신문>은 지난 4월, ‘광복 70주년 기획 2500㎞ 대장정, 신흥무관학교와 잊힌 영웅들’이라는 시리즈로 중국 동북지역 항일투쟁 성지를 돌아봤다. <일요신문>은 광복절을 앞둔 지난 8월 2일 이번엔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다. 이번 여정을 통해 너무나 험난했던 고려인의 발자취를 쫓아보고, 그곳에서 온몸을 불살랐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이번 여정의 기획은 일요신문사와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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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신문>은 8월 2일,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공항에 도착했다. 첫날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더니, 늦은 오후부터는 이내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곳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해선 익히 듣고 왔지만 막상 부딪혀보니 일정이 암담하게 다가왔다. 이러한 날씨는 후에 우수리스크 지역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계속됐다.

공항에는 현지 고려인문화센터가 소개한 한국인 최민우 씨(42)가 나와 있었다. 최 씨는 10년 넘게 이곳에서 거주한 전문 가이드로 취재진이 우수리스크로 넘어가기 전, 절반의 일정을 함께했다. 또한 현지의 정확한 해설을 돕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일정에는 고려인 2세 신 발료자 씨(62)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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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은 첫날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략적인 사전 답사에 나섰다. 61만여 명의 시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는 미항도시다. 현지에서 만난 이석배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유로피안 러시아’를 상징한다면 이곳 블라디보스토크는 ‘아시안 러시아’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도시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동·서양의 미가 묘하게 혼재돼 있었다. 오랜 도시의 역사를 방증하듯, 이곳 대부분의 건물들은 과거의 것 거의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었다. 현지 교민에 따르면, 러시아에선 재건축 자체가 무척 까다롭기 때문에 옛 건물 하나하나가 잘 보존되며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 역시 순수 슬라브인들과 함께 동양의 냄새가 물씬 나는 다양한 혈족들이 길을 거닐었다. 물론 이중에는 고려인들도 있었다.

첫날 취재진이 잠시 들른 블라디보스토크 해양공원은 이곳이 왜 미항도시인가를 실감케 했다. 짙푸른 태평양을 앞에 두고 잘 정비된 공원이 길게 뻗어 있었다. 이날은 특히 지역 해군을 기념하는 특별한 날이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이곳에서 안중근, 최재형, 장지연 같은 항일지사들이 많은 고민을 되뇌지 않았을까.

도착 다음날인 3일 <일요신문>은 본격적으로 고려인의 발자취를 더듬어갔다. 그 첫 번째 장소는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에 위치한 ‘신한촌’ 터. 신한촌은 1863년 한민족이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번성했던 한인 거주지다. 1911년부터 조성된 신한촌은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신보사 등 당시 내로라하는 독립단체들이 한데 모여 있던 곳이다. 한 마디로 한인들의 집단 이주촌이자 항일운동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현재 신한촌 터는 평범한 주택가로 변해있었다. 신한촌 주변엔 야트막한 상점들과 더불어 연립주택이 길을 사이에 두고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이 예전 신한촌의 터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곤 한 가운데 자리한 ‘신한촌 항일운동 기념탑’뿐이었다. 취재진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념탑은 지난 1999년 해외한민족연구소가 한국의 한 사업가의 지원으로 건립했다. 탑은 커다랗고 기다란 석조물 세 개로 이뤄져 있었다. 취재진은 현장을 둘러보던 중 우연히 16년째 기념탑을 관리하고 있다는 고려인 리바체 슬라브 씨(61)를 만날 수 있었다. 지역 고려인 단체 간부 출신인 슬라브 씨는 몇 년 전 뇌졸중을 앓은 뒤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여전히 신한촌을 지키고 있었다.

슬라브 씨는 세 개의 석조물이 나름의 상징이 있다고 소개했다. 맨 가운데 석조물은 ‘한국’을, 좌측은 ‘북한’을, 우측은 고려인을 포함한 해외의 한민족을 상징한다고. 슬라브 씨는 “최근 이곳 기념탑과 기념비에 낙서를 하고 도망가는 러시아인들의 횡포 탓에 어려움을 겪었다”며 “그것을 일일이 지워내느라 고생깨나 했다. 이곳에 좀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슬라브 씨는 더 이상 내색은 안 했지만, 여전히 러시아에 남아있는 인종차별 문제를 얘기하고 싶은 듯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랜 기간 이곳을 지키고 있는 그의 뜨거운 마음이 그대로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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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촌에 있었던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의 흔적들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취재진이 신한촌을 탐방하는 도중에 마주친 ‘엘레나’라는 대형마트는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는 이동휘 선생의 집터였다고 한다.

신한촌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거주지 중 가장 번성했던 곳이지, 최초 정착지는 아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내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곳은 현재의 시내 중심지와 근접한 해안가였다. 이른바 ‘개척리’라고 불리는 마을이었다. 현재의 명칭은 포그라니치나야 거리.

신한촌 조성보다 훨씬 이전인, 1873년부터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개척리에는 당시 한인 민족학교들은 물론 해조신문사, 대동공보사 등 항일 언론사들이 활동했다. 특히 대동공보사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직접 운영하던 곳으로, 후에 <일요신문>이 집중 조명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했던 곳이다.

고려인들이 처음 거주하기 시작한 개척리 터에서도 흔적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고려인들이 처음 거주하기 시작한 개척리 터에서도 흔적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취재진은 신한촌을 빠져나와 개척리 터를 찾았다. 해안가를 끼고 도심지와 가깝게 자리하고 있는 개척리 터 역시 현재는 러시아의 신식 건물들만 줄곧 눈에 띄었다. 옛 흔적들을 찾기는 좀처럼 쉽지 않아 보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두 한인촌이 현재는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데에는 일제와 러시아 정부(제정 러시아와 볼셰비키 정부)의 억압이 컸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최초 한인 정착지인 개척리의 경우, 1911년 당시 러시아 정부가 ‘역병 유행’을 이유로 강제로 한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병영을 세웠다고 한다.

최대 한인촌이었던 신한촌은 두 차례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후에 자세히 다룰 1920년 일제의 ‘4월 참변’에 의해 한 차례 어려움을 겪은 신한촌은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소수민족 이주정책에 의해 직격탄을 맞았다. 일제의 만행도 만행이지만, 두 번째 고비였던 스탈린의 광풍을 신한촌의 고려인들은 넘어서지 못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곳곳에는 그 아픔의 역사적 흔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오케얀스카야 거리에는 고려인들의 앞서 두 가지 아픔을 상징하는 장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오케얀스카야 거리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일제의 옛 영사관 건물이다. 1916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 쓰였다고 한다. 이석배 총영사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이 건물은 연해주 정부의 법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웅장한 스텔라가 돋보이는 2층 구조의 옛 일제 영사관 건물은 깨끗했고,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특히 지붕 위에 여전히 장식물로 남아있는 ‘연꽃무늬’의 구조물들은 이곳이 과거 일제의 건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웅장한 일제의 옛 영사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오케얀스캬야 거리 자체가 예전엔 일본인들이 주로 활동했던 장소라고 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당시 이곳을 거점삼아 각종 무역과 사업에 매진했다. 당시 한민족을 탄압했던 일제의 근거지 오케얀스카야 거리는 현재도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발달되고 화려한 거리였다. 각종 청사들은 물론 고급 레스토랑과 가전제품점 등이 즐비해 옛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오케얀스카야 거리 맨 끝자락을 지나 스베틀란스카야 대로가 나오는데 이곳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인 ‘혁명광장’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 혁명광장은 소련 시절의 이름이고 지금은 ‘중앙광장’이 정식명칭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옛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광활한 광장 중심에는 예전 소련 정부를 위해 싸운 병사를 상징하는 거대 조각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때마침 내린 폭우 탓에 이 광활한 광장과 깃발을 들고 우뚝 선 조각물들은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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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장 역시 우리 한민족에겐 크나큰 아픔의 장소로 남아있다. 1937년 몰아친 스탈린 정부의 소수민족 이주정책에 의해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곳곳에 강제 이주 조치를 당한다. 당시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 조치를 통보받고 집합했던 곳이 바로 이 혁명광장이었다. 광장을 걷는 내내, 당시 막막했던 고려인들의 안타까움이 발끝에 묻어나는 듯했다.

취재진은 블라디보스토크 일정의 마지막인 블라디보스토크역으로 향했다. 앞서 혁명광장이 고려인 강제 이주의 집합소였다면, 블라디보스토크역은 그 시발점이었다. 1912년에 건설된 역사는 현대 건물과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고, 웅장했다. 이곳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출발하는 시작점으로 유명하다. 역사 맞은편엔 거대한 레닌 동상이 거창하게 취재진을 반겼다.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블라디보스토크역을 통해 우리 고려인이 머나먼 곳으로 떠나갔다. 1863년부터 그저 기근을 피해 살기 위해, 때론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겨우겨우 정착한 제2의 고향 연해주를 다시금 등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역사는 현지 고려인에게 있어선 크나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때마침 내린 폭우가 마치 당시 우리 조상들의 눈물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일요신문>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음날, 좀 더 남쪽의 외곽지역으로 향했다. 크라스키노를 비롯한 연해주 남쪽 지역엔 좀 더 원시적인 옛 고려인들의 정착 역사와 더불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떠난 안중근 의사의 발길이 스며 있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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